제 말 좀 들어주세요.

교직관련 2016. 11. 13.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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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피 백업자료: 2003/07/23

학부모 면담이 있던 날, 어머니들 사이에 아버지가 한 분 계셨다. 

그분이 민호 아버지라는 사실은 얼굴만 보고도 알 수 있었다. 

민호는 친구와 싸운 일 때문에 작년 말에 우리 학교로 전학 온 고등학교 2학년 학생으로, 여전히 거친 성격을 버리지 못해 튀는 아이였다. 

면담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민호 아버지는 계속 책상만 바라보고 죄 지은 학생처럼 앉아 계셨다. 

어머니들께서 모두 돌아가신 뒤 조용한 교실에서 민호 아버지와 나는 마주 앉았다. 

민호 아버지께서는 민호가 중학교 시절부터 겪은 가슴 아픈 이야기들을 하나 둘 꺼내 놓으셨다. 

지금은 선생님들을 믿지 않는다는 말씀도 하셨다. 

얼마 전에 내가 야간 자율 학습을 하고 싶은 사람은 손을 들어 보라고 했을 때,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손을 들지 않은 것도 담임선생님에 대한 반항심때문이었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찔끔했다. 민호가 야간 자율 학습을 할 만한 아이가 아니라고 생각하여 관심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 이 얼마나 부끄러운 편견이었던가! 

미안한 마음에 고개를 못 들고 있는 동안 민호 아버지의 말씀은 계속 되었다. 

공부를 잘했던 민호의 중학교 시절, 귀여웠던 초등학교 시절까지 기나긴 이야기를 들으며 난 교단에 처음 서던 해 다짐했던 '학생들의 과거를 보지 말자. 

현재와 앞날을 바라보자'라는 말을 되새김질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민호 아버지 눈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선생님, 제 말씀을 끝까지 다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동안 여러 선생님께서 제 말을 다 들어 주지 않고 당신들 말씀만 하셨습니다. 제 눈에는 장점이 많은 아이인데 단점에 대해 이야기할 수 밖에 없어서 속이 많이 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정말 후련하게 하고 싶은 말 다했습니다. 고맙습니다." 

내 손을 쥐고 어린아이처럼 울고 웃는 내 또래 아버지를 바라보며 교사의 한 사람으로서 정말 미안했다. 

또 민호와 민호 아버지뿐만 아니라 편견과 경험만으로 학생들을 판단하고, 사랑이 아닌 요령으로 아이들을 대했던 나 역시 마음의 상처가 있는 환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민호와 함께, 민호 아버지와 더불어, 우리 셋이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지면 어깨 걸고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 한 모퉁이를 담당했으면 하는 소망을 품어본다.

좋은 생각 2003년 8월호에 실린 문경보선생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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